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실리오스 2세 (문단 편집) === 불가르인의 학살자 === ||[[파일:external/xartografos.files.wordpress.com/cebcceaccf87ceb7-cf84cebfcf85-cebacebbceb5ceb9ceb4ceafcebfcf85.jpg|width=100%]]|| ||<:>1014년, 바실리오스 2세 황제의 지휘하에 클리돈 통행로에서 불가리아인을 포획한 로마군.[br][[불가리아 제1제국]]의 말기인 이 시절쯤 되면 불가리아에서 슬라브적 색채가 튀르크적 색채보다 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는 튀르크 + 슬라브의 일종의 연립 정권으로 출발했고, 나라 이름부터가 튀르크족의 일파인 '불가르'족에서 따 온 만큼 튀르크 쪽이 상위 파트너였다. 하지만 불가리아 및 그 주변 발칸 반도 북부 ~ 동유럽권에서는 슬라브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점차 슬라브화되었다. 단적인 예로 [[군주의 칭호]]가 불가리아 초창기에는 [[칸]]이었는데, 913년 동로마에 대한 승전 이후 로마와 맞먹는다는 자부심을 담아서 '카이사르'의 슬라브식 음차인 [[차르]]로 바뀌었고, 군주의 이름들도 초대 군주 [[아스파루흐]]부터 시작해서 [[코르미소쉬]], [[비네흐]], [[텔레츠]], [[우모르]],[[ 오무르타그]] 등 튀르크-몽골적 느낌이 강한 이름이 많다가, 9C 중반 [[보리스 1세]]를 시작으로 '''[[블라디미르(불가리아 제1제국)|블라디미르]]''', [[시메온 대제]], [[사무일]], [[로만(불가리아 제1제국)|로만]] 등 기독교-슬라브적 느낌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만은 Roman, 즉 자신들의 최대의 적인 '로마인'이 맞다.] 머리채가 잡힌 불가리아인의 복식이 유럽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동방적(유목민적, 몽골 / 튀르크적) 색채가 강한 것이 주목된다.|| 제국 내부가 안정된 후, 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맹세를 지키기 위해 불가리아에 다시 나타났다. 약 15년에 걸쳐 전개된 이 전쟁은 아쉽게도 기록이 별로 없다. 1014년경에 이 전쟁의 결과를 알 수 있는 전투가 나타나는데, 킴발롱구스 협곡에서 바실리오스 2세는 [[사무일]]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을 대패시키고, 15,000명의 포로를 잡았다.(1014년 7월 29일, [[클레이디온 전투|클리디온 전투]] 또는 킴발롱구스 전투) 그는 이 포로들에게 끔찍한 형벌을 내리고 돌려보냈다. 15,000명의 포로들을 100명씩으로 나누어 1명은 애꾸, 나머지는 전부 눈을 뽑고, 애꾸가 나머지 99명을 인솔해 불가리아로 되돌아가게 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불가록토노스(Βουλγαροκτόνος), 즉 '''불가르인의 학살자'''라 불리게 되었다. 이 포로들의 행진을 본 사무일은 홧병으로 죽고 말았고, 3년 뒤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에 정복되었다.[* 13세기 초 트라키아에서 동로마인을 학살하고 다닌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칼로얀]]은 과거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록토노스'라고 불렸음을 의식하여 스스로를 '로마녹토노스(Romanoktonos)', 즉 '로마인의 학살자'라고 일컬었다. 구글에도 자동검색어로 'Kaloyan the Roman slayer'가 뜬다.] 이 불가리아 포로 학살을 [[야사]]로 여기는 견해가 있으나, 이 기록 자체는 (관찬 사서에 가까운)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의 약사 등이 출처이다. 실제로 클레이디온 전투와 바로 그 전에 대규모 야전이 있었고, 편집증적일 정도로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인 바실리오스 2세가 그 이후로 수도로 돌아가 공세의 고삐를 늦추고 소모전으로 일관해서 불가리아를 고사시켜 버리는 전법을 보인 여유를 봤을 때, 불가리아가 그때의 패배에서 절멸에 가까운 손실을 겪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특히 저 15,000명의 병력은 불가리아 추정 총 병력 35,000명의 40퍼센트를 넘어가는 엄청난 수치로, 저 정도의 병력을 그렇게 짧은 시기 안에 다 잃었으면 사실상 그 이상의 저항은 불가능해졌다고 봐야 한다. [[사무일]]이 충격을 받고 쓰러져 죽었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로 큰 심리적 타격을 입었다는 얘기. 즉 당시의 정황과 (실화든 프로파간다든) 널리 인정받은 점을 미루어보아, 과장은 있을 수 있지만 아예 야사일 수는 없다. 무엇보다 바실리오스는 불가리아 정복 이전에 시리아 원정 당시 포로로 잡은 [[베두인]] 병사들의 [[오른팔]]을 잘라버리고 조지아 원정에서는 [[압하스인]] 포로들의 두 눈을 뽑아 장님으로 만든 전적이 있다. 이렇듯 전장에서는 냉혹한 장군이었지만 불가리아를 재정복하고 벌인 그의 행보는 그와 대비되게 매우 관대하고 유화적이었다. 그의 개인적인 원한은 오흐리드의 황궁을 약탈해 보물들을 제국군 장병들에게 나눠 주며 폐허로 만드는 데에서 끝내고 기존 불가리아 황족들이나 귀족 등 지배층들은 손대지 않고 오히려 매우 우대했다. 죽은 차르 [[이반 블라디슬라프]]의 황후 마리아를 로마 제국에서 여성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작위인 조스테 파트리키아에 봉하고, 그녀의 아들들은 주요 테마의 스트라테고스로 임명했다. 그리고 불가리아 각계각층의 귀족들의 아들들은 동로마 여인들과 결혼하게 주선하고, 딸들은 동로마 남편감을 찾아주어 제국 귀족층에 편입시켰다. 또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불가리아 속주 주민들이 세금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세금을 인하하고 [[대동법|곡물로 현물 납부할 수 있도록]] 해서 민심을 잡았으며,[* 원래는 화폐 납부였는데, 따라서 농민들은 금화를 곡물로 바꿔서 세금을 내야 했다. 하지만 현물 납부를 허용해서 널뛰는 중세 화폐가치에 요동치지 않고 정해진 양만 내도 되게 한 것.] 불가리아 정교회 역시 대주교를 황제가 서임하게 된 것 외에는 건드리지 않아서 독립성을 유지시켰다.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를 병합한 이후 불가리아의 남은 군대를 그대로 제국 불가리아 테마병들로 편입하였는데 이 병력은 제국이 불가리아를 제압하는데 소모한 것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거뜬히 초과하는 수치로 추산된다. 불가리아 정복보다는 이런 편집증적인 인력 관리에 바실리오스 2세의 진면목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